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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

[대항해시대] 6장 - 노예무역: 근대 세계의 비극

by 마고커 2023. 11. 7.


노예무역에 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널리 알려진대로 아프리카의 희생을 강조하는 것과, 아프리카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소위 '수정주의' 견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부연하면, 두번째 견해는 유럽의 '죄악'을 면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피해만 강조하다 아프리카인들이 무능력한 존재로 그려지는 것을 막기 위한 오히려 진보적인 것이다. 아프리카 인들 역시 모든 면에서 역사의 중요한 주체였지만, 이 주장의 위험성 또한 주지해야한다. 

 

아프리카 내부의 노예제와 노예교역

 

토지 소유가 우선인 다른 문명과 달리 아프리카는 사람의 소유가 우선이었다. 즉, 어떤 땅이든 누군가가 농사를 짓고 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그 땅을 경작하는 것이 허용된다. 지배자는 '사람'을 지배함으로써 생산물을 차지하였고, 아프리카 사회에서 국왕과 귀족은 지주가 아니라 노예주였다. 전쟁포로를 노예로 파는 정도를 넘어서 아예 노예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배적 관점에서 보자면 노예는 투자 대상이고 부의 과시이자 세력을 증대시키는 수단이다. 따라서, 노예들을 혹사시킬 이유가 없었으므로, 아프리카 노예가 광범위하게 존재한다는 말은 맞지만, 신대륙의 플랜테이션에서 받은 인상을 투사해서는 안된다. 

 

대서양 노예무역은 이런 노예의 성격을 가산 노예(chattel slave, 인격권이 전적으로 부인됨)로 바꾸어 놓았고, '흑인=노예'라는 새로운 개념, 즉 최악의 인종주의를 만들었다. 

 

전술했듯이 아프리카의 노예무역은 그 역사가 매우 긴데, 1400~1900년 사이에 이집트로 이동한 노예만도 160만명이었다.  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사하라 사막 북쪽으로 강제 송출된 노예는 940만명으로 추정되며, 이 가운데 25% 정도의 사람들이 죽거나 사막 내의 오아시스 공동체에 남게 되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로코나 이집트로 끌려 갔다. 같은 기간에 약 500만명이 홍해를 건너 아라비아 반도와 서남아시아로 송출되기도 했다. 즉, 북부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끌려 간 노예의 수가 사실은 신대륙 방향의 대서양 노예무역과 비슷하거나 더 많다는 충격적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가내 노예 혹은 다양한 직종의 하급 일을 맡아서 할 뿐, 아메리카의 플랜테이션처럼 대규모 강제 노역을 하지는 않았다. 인도로 들어온 아프리카인들은 종속적인 강제 노동을 해야했지만, 군인으로 많이 고용되거나 양산 받쳐 주는 일 등 온갖 잡다한 일을 하는 등 '사치품'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인도에 들어온 유럽인들 역시 이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며 많은 아프리카인을 노예로 삼았다. 

 

이들이 플랜테이션과 같은 강제노역과 크게 다르지 않은 환경에 처하기도 했다는 연구도 있다. 우선 2~3개월 거쳐 뜨거운 사막을 건너와야 했으며, 잔지바르나 이란으로 온 흑인 노예들은 강제 노역에 시달리기도 했다.

 

 

근대 대서양 노예무역

 

유럽인이 처음 아프리카인을 포획, 노예화한 것은 1441년 포르투갈인들이 모리타니아 해안에서 10명의 주민을 잡아간 때이다. 한번 노예의 가능성이 확인되자 곧바로 3년 뒤에 300명의 아프리카 인이 리스본으로 끌려 갔으며, 1482년에는 상호르헤델미나를 노예무역의 본부로 삼았다. 

 

대서양 노예무역으로 인해 아프리카 해안에서 '출발'한 사람은 1,100만명에 이르고, '도착'한 사람은 950만명이었다. 국가별로는 포르투갈이 46%의 노예를 수출해 압도적 1위이지만, 핵심 시기인 1651~1800년 기간 중에는 영국이 1위였다. 19세기에 들어 영국 등 주요국가들이 노예무역을 중단했지만, 포르투갈은 브라질로의 수출을 지속했기 때문이다. 많은 아메리카 식민지를 거느린 에스파냐는 비중이 상당히 낮았다. '아시엔토'라는 노예무역 독점권을 갖고 있어서, 다른 나라들(특히, 포르투갈)이 스페인의 식민지에 노예수출을 대행했기 때문이다. 에스파냐는 19세기에 가서야 노예를 스스로 조달한다. 

 

세네갈에서부터 카메룬에 이르는 해안 지역이 노예무역의 최대 대상지였으며, 1,800년대에는 모잠비크와 탄자니아 등 동남아프리카까지 노예 무역이 퍼져왔는데 이들은 항해 거리가 멀기 때문에 사망률이 특히 높았다. 이들이 송출된 지역은 브라질 남동부와 자메이카, 바이아 등지가 가장 많아 이들만 합쳐도 40%가 넘는다. 브라질이 가장 중요한 수요처가 된 것은 16세기 후반에 사탕수수 재배가 이 지역에 확대 되었고, 1690년에 미나스제라이스 금광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포루투갈에게 축출된 네덜란드는 서인도 제도로 옮겨갔는데, 이 때 서인도제도로 사탕수수 재배지역이 넓어진다. 이에 따라 노예 수입도 늘어났고, 영국과 프랑스도 그들의 식민지에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건설했다. 아프리카 서해 지역, 즉, 볼타강 동쪽부터 라고스에 이르는 지역을 포르투갈인들은 미나 해안이라고 부르지만, 영어로는 노예 해안이라고 부른다. 

 

 

브라질과 서인도제도에 비해 영국과 네덜란드가 식민지를 건설한 북아메리카 지역은 상대적으로 노예무역이 늦었다. 하지만, 담배, 인디고, 쌀, 면화 재배가 확되면서 노예의 수도 증가했는데, 대규모 플랜테이션 방식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12%의 사람들이 항해 중에 사망했는데, 17세기에는 22%, 18세기에는 10%로 낮아졌다. 사망률은 거의 전적으로 항해 거리에 비례하여 커졌다. 

 

노예무역은 대체로 국가가 후원하는 회사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영국의 왕립 아프리카 회사, 네덜란드 서인도회사, 프랑스 기아니아회사 등이 그런 사례들이다. 이 회사들은 개인사업자가 민간 자본을 모아서 운영하는 방식이었지만 동시에 국가의 지원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이 회사들은 안전 확보를 위해 아프리카 해안에 거래 거점을 두어야 했는데, 이들의 안전을 위협한 것은 아프리카 인들이 아니라 유럽의 경쟁자들이었다. 유럽 경쟁자 중에는 정부가 부여한 독점권에 저항하여 '자유 무역'을 주장하는 자국 상인들도 포함되었는데 이런 경쟁자들을 경계하면서 요새를 거점으로 내륙의 노예 공급선을 확보하여 거래를 하는 방식을 성채 무역(castle trade)이라고 한다. 성채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아프리카 측의 중간상인들이 노예들을 데리고 오던 때가 지나고 유럽 상인들 스스로 해안을 돌아다니며 노예 판매인을 찾아야 하게 되었는데, 강 상류로 올라가서 아프리카 상인과 접촉을 시도한 방식을 코스팅(coasting)이라고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주민이 유럽 상인들과 아프리카 인들 사이에 중개 역할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을 '란시도스'라고 부른다. 이들은 아프리카 서부의 카보베르데 출신이며 일부 유대인들이 합류했고, 이들이 현지 여인들과 결혼해서 낳은 아이들이 전형적 중개 집단이 된다. 아프리카 상인들이 너무 높게 가격을 부르는 경우, 노예상들은 배를 타고 연안을 따라 항해하여 이웃 지역으로 가서 노예를 구매했는데, 충분한 노예 확보까지는 4~6주, 대개는 3~4개월이 소요되었다. 이 사업의 핵심 요소는 노예 가격이 제일 높은 수확철에 노예를 수송하는 것인데, 지역마다 수확철이 달라 노예무역업자로서는 시간 맞추는 것이 쉽지 않아서 작고 빠른 배를 이용하였다. 

 

유럽 상인들이 노예를 살 때 아프리카에 수출한 상품은 직물, 알코올, 총, 화약, 철물, 구리, 도구, 거울, 구슬 등이 있었는데 가장 큰 비중은 직물이었다. 이런 상품 목록을 보면 싸구려 물품을 주고 노예를 사왔다는 주장은 신화에 불과하다. 아프리카의 지배층은 특이한 색깔, 디자인, 질감, 모양을 가진 외국산 직물이 자신들의 위세를 드러내는 중요한 방편이었다. 아프리카에 수출된 총이 노예를 포획하는 데에 쓰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수출된 총의 품질은 저급해서 그저 지배층의 위세 과시가 주된 용처였다. 유럽인들은 해안 지역에만 머물렀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아프리카인들에게 유리하게 거래가 결정되었던 것은 분명하며, 유럽 상인들은 아프리카 권력자들과 조약을 맺어서 공급 거래선을 확보하는 데에 전력을 다했다. 한동안 노예무역의 수익률이 100~300%에 달한다고 알려졌으나, 연구결과 이는 부정되었다. 이득과 손해나는 경우를 포함해 평균 수익률은 3%대였는데 당시 기준으로 높은 수준은 아니었다. 노예 구입 가격이 높고, 아프리카 상인들에게 넘겨주어야 하는 물품들이 비싼 데다가 원거리에서 수송해 와야 했으며, 고가의 선박과 의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영국 경제 성장의 주요 동력은 영국 내 설탕 수요의 증가이며, 이것이 '결과적으로' 서인도제도에 대한 공산품 수출과 서인도제도의 노예 구입 증가를 초래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전반적으로 서인도제도-영국-아프리카 간의 경제적 상관성이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노예무역 연구의 맹점 중 하나는 아프리카 인들이 가장 큰 희생을 치른 이 엄청난 사건에 대해 정작 아프리카 내부의 측면이 무시되었다. 아프리카 내부에서 수송되는 노예들 중 40%는 해안까지 오는 동안 목숨을 잃었다. 17제곱미터의 수용소에 200명의 노예들이 돼지, 염소와 기거했다. 대다수 노예들이 남성이었기 때문에 마을에는 남성대 여성비가 80/100 정도였고, 지역에 따라 40/100 정도까지 떨어졌다. 아프리카 인구는 노예수출에도 비해 큰 변동이 없었는데, 여성들이 마을에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여성이 많아짐에 따라 일부다처제가 극심해졌고 귀족은 때때로 20~30명의 아내를 두기도 했다. 여자들은 온갖 종류의 가사일과 더불어 농사를 지었고 조금이라도 귀족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면 아이와 함께 당장 팔아버리기도 했다. 노예는 단지 여러 상품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세네감비아의 사례를 보면 16~17세기에 소가죽을 주로 수출했는데, 17세기 말에는 노예 무역의 비중이 커져서 전체 수출 중 50%를 넘었다. 18세기 말에는 고무가 중요해졌는데 이는 노예무역의 3배가 된다. 마지막으로 1850년대에는 땅콩이 세네갈 고무를 대체했다. 인간이 단순히 상품의 한 종류로서 '처리'된다는 것이 노예무역의 비극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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