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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

[대항해시대] 3장 - 근대 해양 세계의 내면 II

by 마고커 2022. 4. 4.


선원들의 세계

 

네덜란드를 떠나 목적지인 반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15개월이 자난 뒤였다. 동남아사이에 도착하고서도 이들의 행로는 아주 험난하였는데, 일부 선원들이 현지인들에게 붙잡혀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신속금을 내고 간신히 풀려나기도 하고, 반대로 그들이 지나가던 정크 선들을 공격해서 노략질을 하기도 했다. 선원들 간에 늘 싸움이 벌어졌으며, 독살사건도 일어났다. 자바섬에 이르렀을 때에는 원래 출발했던 248명 가운데 94명이 생존해 있었다. 

 

항해는 고통의 연속이었으며, 선원들의 삶은 힘들고 비참하고 대개 짧았다. 파이프를 문 마도로스의 멋진 모습과 같이 우리가 선원에 대해 가지는 낭만적인 이미지는 실제의 모습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선원생활이 말로 하기 힘들 정도로 혹독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모두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노동력을 파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암스테르담에서는 특이하게도 여관 주인이 선원 모집 일을 맡아서 했는데, 평판이 좋을 리가 없는 이 사람들은 "영혼 장사꾼" 혹은 "고양이, 개"라고 불렸다. 이들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일들을 햇으며, 제공한 사람들 수에 비례해서 회사로부터 증서를 받는다. 많은 돈을 벌 듯 하지만, 배가 침몰하거나 데려다 준 선원이 중단되면 지불이 중단되기 때문에 사실 꼭 그렇지도 않았다. 따라서, 여관 주인은 증서를 미리 할인해서 팔았고, 할인율은 심지어 72%에 달했다. 여유 있는 상인들이 증서를 구입했으므로, 큰 돈을 버는 이들 상인이었고, 여관 주인은 연명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영국에서는 자원의 형식으로 선원을 충당하기 힘들어 강제징모대(press-gang)가 동원되었고, 건장해 보이면 징집되기 쉬워 사람들은 상처를 황산으로 태워 괴혈병처럼 보이도록 꾸미기도 했다. 알선업자들은 촌뜨기나 뜨내기들에게 빚을 갚는 대가로 배에 타게 만들었는데, 자질이 부족하다보니 선장이 선원들을 통제하는 것도 갈수록 힘들어졌다. 

 

전함 포테킨 중

항해의 어려움을 더하는 요소는 보급이었다. 신선한 음식은 출항 후 몇 주안에 떨어졌고, 음식에서 구더기가 나오는 것은 전함포테킨의 한 장면만은 아니었다. 물은 쉽게 상해서, 악취가 심한 물을 마시는 것은 고역이었다. 이는 나무통을 사용했기 때문으로, 금속병을 사용하면 괜찮다는 것은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나마도 식량과 물이 부족했는데, 4개월치 식량과 한달치의 물을 싣는다면 1인당 500kg의 물자를 실어야 했는데, 보급품을 많이 실으면 교역상품을 쌓아둘 곳이나 생활 공간이 줄어들기 때문에 보급품을 줄여야 했다. 선원들은 괴혈병으로 고생했고, 경험적으로 비타민씨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상하기 쉬운 오렌지 쥬스를 많이 실을 수 없어, 예방약으로 알코올을 선호했다. 독할수록 효과가 크다고 믿었고, 아침부터 술을 마시곤 했다. 괴혈병이 해결된 것은 18세기말 쿡 선장의 시대에서였다. 소금에 절인 양배추가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했고, 3,000kg 넘게 배에 실었다. 의복과 침대보를 자주 공기에 말렸고, 배는 식초와 포탄의 혼합물로 훈연시켰다. 하지만, 선원들은 여전히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고, 이에 대비한 선의는 대개 '이발사' 수준으로, 마젤란의 선단은 270명의 선원이 출발했지만 15명만 돌아오기도 했다. 

 

선원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 중 하나는 선상 규율이었다. 동성애는 '멍청한 죄'라고 불리며 사형에 처해졌기 때문에, 요리사들은 육욕을 줄인답시고 음식에 초석을 듬뿍쳤다. 더 좋은 방법은 지치도록 갑판을 닦게 해서 아무 생각이 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누구든 선장이나 대리인의 명령을 거부하면 사형에 처했고, 사무장의 일에 간섭하거나 협력하지 않으면 반란자로서 처벌되었다. 피를 흘리게 한 자는 마스트에 못을 밖고 다른 손은 묶어서 벗어나려면 손을 찢어야만 했다. 만일 사람을 살해하면 죽은 자와 함께 묶어 바다로 던졌다. 이런 규율을 강제하기 위해 극단적인 폭력이 상시로 나타났는데, 맞은 사람은 한 동안 손과 팔을 위로 들어올리지 못했고, 머리를 여러 차례 맞으면 한동안 음식을 삼킬 수 없을 정도였다. 선장과 간부들은 얼마든지 특정 선원을 괴롭힐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위로부터의 억압에 저항하는 방법은 태업, 스트라이크, 선상 반란, 집단 탈주 등이었다. 파업을 뜻하는 스트라이크는 런던의 상업에 타격을 가하고자하는 의미로 이때 시작된 것이다. 선상 반란은 극단적인 형태로, 1/5정도의 간부 살해가 일어나고, 반 정도가 실제로 배의 통제권을 장악했으며, 1/3 정도는 해적이 되었다. 선원들의 생활은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욕하는 것은 기본이고, 술 마시기, 도둑질, 살인, 사기, 험담 등 부르주아 문화와 대척점에 있었다. 금욕주의를 거부하고, 육체적 향량을 추구했으며, 음탕과 방종을 추구했다. 종교는 경멸하면서도 미신에는 크게 집착했다. 

 

선원들에 대한 극심한 학대와 사적인 폭력은 보편적인 것이었을까? 선장이 부하 선원들을 잔혹하게 다루어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규정은 중세법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았다. 즉, 극단적인 선상 폭력 역시 자본과 인력의 대규모 집중과 동시에 강력한 계서제(hierarchy)가 형성된 근대의 특징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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