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 귀금속, 근대세계
콜럼버스 이후 아메리카 대륙에서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이 산출되어 유럽으로 흘러들어 온 가운데 많은 양은 유럽 내에 잔존했고 이것이 이 지역의 인플레이션을 유발했다. 이는 특히 상공업자들의 이윤을 높여서 유럽 경제의 발전을 자극했다. 은의 일부는 아시아로 들어갔는데 아시아 산물에 대한 유럽의 수요는 크지만, 그 반대는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동, 인도, 동남아시아 등을 거쳐 많은 양은 최종적으로 중국에 흘러들어 갔으며, 중국에 유입된 귀금속은 도로 나가지 못했다. 말하자면 중국은 '흡입 펌프', '귀금속의 무덤'이 되었던 것이다.
크게 보면 이 그림이 맞을 수 있지만, 세밀하게는 여러 부분이 틀렸거나 모호해진다. 첫째, 은은 유럽에서 아시아로 갔지만, 금은 오히려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갔다. 둘째, 중국은 은을 수입했지만, 일본은 오히려 은을 수출했다. 셋째, 금이나 은의 유출이 다이내믹한 경제의 특성으로 보기도 어렵다. 멕시코의 금은이 마닐라를 거쳐 중국으로 갔지만 멕시코 경제의 활력의 증가로 보기로는 어렵다. 마지막으로 화폐와 귀금속이 오간 것 만으로 세계는 하나의 단위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다. '상층'에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활발하게 유통되는 화폐들을 관찰할 수 있지만, 그 아래에는 지방적 필요만을 충족하는 저급한 수준의 화폐가 끈질기게 잔존했다.
어쨌든 볼리비아의 포토시 은광, 멕시코의 은, 브라질의 금을 채굴하면서 16~18세기까지 유럽으로 들어온 귀금속은 은환산량으로 1만톤에서 15만톤까지 증가하였다. 피셔 방정식(PQ=MV)에 대입했을 때, 화폐량(M)의 증가가 물가(P)의 상승을 가져왔다. 인플레이션 효과는 곡가, 임금 등에 천천히 반영되지만 공산품 가격은 상대적으로 더 빨리 상승했으며, 상공업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고, 이는 곧 유럽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동아시아의 귀금속
중국으로 은이 흘러들어간 것은 중국의 진귀한 물건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다. 중국에서는 다른 어느 문명권보다 일찍 지폐를 발행했었는데, 명대에 들어와서 지폐를 초과 발행하여 초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지폐 사용이 중지되었으며, 은화가 지폐를 대신해 유통된다. 중국의 조공국들 또한 이 체제에 편입되었어야 하므로, 중국은 은의 값을 높게 쳐 주고 서양에서 들여왔다. 서양에서는 은을 주고 금을 가져와 다시 유럽에서 비싸게 팔아 이중으로 수익을 늘렸다. 유럽도 은화가 통용되었을 텐데 이런 문제가 없었을까? 다행히(?) 유럽에서는 신용제도가 일찍 발달하게 되어 그만큼의 은이 필요 없었다.
하지만, 중국으로의 은유입을 아메리카-유럽-중국의 루트만으로 설명하는 건 지극히 유럽 중심 주의적인 생각이다. 16세기 일본에서 은광산업이 크게 일어나 이들 중 상당수가 중국으로 흘러가고 중국에서는 금을 가져왔다. 이 거래만으로 일본은 60%의 이득을 얻었으나, 교역이 지속되면서 금은의 교역 가치는 안정화되었다. 17세기 들어 일본에서도 은의 사용이 늘어나고 채굴량은 줄어들자 대중국 수출을 줄였다는 게 정설이었으나, 대마도와 조선을 통해 여전히 중국으로 유입되었다는 설도 유력하다. 일본은 좋아하는 인삼의 대가로 조선에 은화를 지불했고, 조선은 동지사 일행을 통해 중국으로 은화를 조공하게 되는 식이었다.
구리, 카우리, 아편
교역에 금과 은만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 은 채굴이 줄어들던 차에 18세기 일본에서는 큰 구리광이 발견되게 된다. 교역은 대체로 물물교환(대만의 가죽, 인도네시아의 후추와 향신료, 코로만델의 직물 등)을 통해서 이윤을 남기며 유럽으로 가기도 했지만, 모든 거래에서서 항상 이윤을 보며 할 수는 없었다. 특히, 이런 복잡한 활동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려면 상품 대신 화폐나 금속을 통한 결제가 필수적이었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구리였다. 일본 구리는 중국에 수출되어 화폐 주조에 쓰이기도 했지만, 80% 이상이 동남아로 흘러들어갔다. 최대 수입처가 코로만델(뉴질랜드)이었는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이 지역에서 직물을 구입하고 금으로 지불하다가 금 확보가 어려워지다 구리를 지불 수단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일본의 구리는 이윤 가능성에 따라 말라카와 바타비아로도 흘러들어갔고, 네덜란드 상인들은 구리의 무역에 있어 영국과 포르투갈, 무슬림 상인들과 경쟁해야 했다. 18세기 후반 들어 일본의 구리 수출량은 크게 감소했는데, 중국 정부는 일본 구리를 가급적 많이 사들여오려고 노력했다. 경쟁이 심한 동남아시아로 구리를 보낼 필요가 없었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이 무역을 독점해 다시 큰 이윤을 남겼으나, 영국 동인도 회사가 유럽의 구리를 아시아로 들여오며 일본의 구리 교역은 종결된다.
아프리카의 원시성으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카우리 조개는 수백년 이상 화폐로써의 기능을 충실히 해 왔다. 인도에서는 금화 1, 은화 24, 동화 4, 카우리 11의 비율로 유통되기도 했다. 카우리 하나가 은화의 1/5000에 불과하므로 엄청나게 많은 카우리가 유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카우리 조개는 몰디브와 잔지바르 등 동아프리카 해안지역에서 많이 나지만, 유통은 실론, 벵골, 윈난, 페르시아만 지역 등 다양한 곳에서 이루어졌다. 포르투칼과 네덜란드 상인들이 카우리 거래를 시작했고, 19세기에는 영국인들이 매년 100톤씩 아프리카에 수출하기도 했다.
어떻게 카우리 조개는 윈난성 같이 먼 곳에서도 활용될 수 있었던 이유는 카우리조개가 복제 불가능한 형태였기 때문이다. 인도와 접촉하던 북아프리카 상인들이 카우리를 건네 주자 그대로 화폐처럼 통용된 것이다. 아프리카 내부에서는 고액거래에서는 금이 소액 거래에서는 카우리가 사용되었다. 윈난의 경제가 발달하고 명대에 일어난 한족의 유입 등으로 중국 정부가 의도적으로 구리 주조를 유통하자 카우리는 17세기 중엽부터 윈난에 유통되지 않았다.
19세기 중반 아편전쟁의 발단은 유명하다. 중국의 차를 들여오는 대가로 아편을 유통 시킨 것 때문인데, 중국에서는 '아편전쟁'이라고 부르는 반면, 영국에서는 '자유를 위한 전쟁'이라고 강변했다. 18세기 들어 은확보가 힘들어지고, 유럽이 아메리카의 사탕수수, 담배 등을 많이 수입하게 되어서 이 지역에서도 대금 지불을 해야 했으므로, 아메리카의 귀금속을 더 이상 들여올 수 없게 되었던 것이 발단이 된 것이다. 아편전쟁은 어떤 대의를 위한 것이기보다는 그저 당장 부족한 '지불 수단의 확보'가 중요한 목적이었다. 1729~1800년 동안 아편 수입량은 20배 증가했으나 중독자는 10만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싸고 강력한 파트나 아편이 개발되면서 1839년에 이미 1천만명의 중독자가 사용하용할 양이 들여왔으며, 20세기 초에는 중국에 4천망명의 중독자가 생겼다. 이 때문에 막대한 양의 은이 중국으로부터 빠져나갔고, 영국은 이렇게 받은 은으로 무역 적자의 상당량을 상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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