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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

[대항해시대] 3장 - 근대 해양 세계의 내면 I

by 마고커 2021. 12. 14.


바다를 통한 전 지구적인 상호 소통의 증가에는 조선업과 항해술의 발전, 선원의 세계, 해상 위험, 해적의 발호 등이 따라오지만, '근대 자본주의 체제의 발전' 차원에서 다룰 문제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바다가 누구의 것도 아닌 만인의 공통된 길이었지만, 바다는 잔인한 무력 충돌의 무대가 된다. 이 장에서는 선박 디자인의 발전과 같은 기술 측면과 더불어 대규모 자본의 축적, 지식과 기술의 결합, 국가를 정점으로 하는 폭력의 증가, 선원 집단이라는 프롤레타리아층의 형성, 폭력성에 대한 저항과 이탈 등의 문제를 다룬다. 

 

조선업과 항해술의 발달

 

자동차와 기차가 등장하기 이전 시대의 주요 원거리 수송 수단은 낙타대상(캐러번)이었다(다른 동물은 물을 많이 마시면 적혈구가 파괴되어 죽지만, 낙타는 5-10분 이내에 무려 100리터의 물을 마시는 것으로 진화하였다). 쌍봉낙타는 200kg의 짐을 지고 하루 50km까지, 단봉낙타는 100kg의 짐을 지고 60km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그래서 1톤의 화물을 가지고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는 경우 20마리의 단봉낙타를 이용하여 8-10주간 여행을 해야 했다. 

 

<대서양 항해, 출처: 대항해시대>

 

1500년 이후, 유럽인들은 세계의 바다를 연결했고, 이 바닷길을 통해 진정으로 전 세계가 상호 소통하도록 만들었다. 유럽 대륙을 떠나 다른 대륙으로 갔다가 안전하게 귀환하기 위해서는 대서양 전체의 바람과 조류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했다. 증기선을 이용하고부터는 엄청난 모터의 힘으로 자연의 제한을 이겨내는 것이 가능해졌지만, 그 이전 시대에 바람과 조류를 놓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였다. 항해 관점에서 위 그림의 3개의 커다란 바람과 조류의 타원형 구조를 알고 있게 됨으로써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발전이 작용했는데, 첫째, 기술적인 관점에서 선박과 항해술 관련한 여러 요소들이 발전했고, 둘째, 거기에 상응한 자본과 노동의 결합과 국가 기구의 지원이 있었다. 15세기까지 바다를 지배한 배는 갤리선이었다. 3명이 앉는 벤치 25개를 보유한 갤리선은 길이 40m, 너비 5m, 높이 1.75m에 총 톤수 100톤이 안되었지만, 노수들이 전투에 활용될 수도 있었고, 기후 여건이 불리해도 항해가 가능했으므로 시대를 주도했다. 하지만, 1마리 말의 힘을 이끌어내기 위해 12명의 노수를 요구하는, 그것도 지속적인 동력을 발생시킬 수 없었던 갤리선은 원거리 항해에는 당연히 불리했다.

 

<갤리선, 출처: 위키피디아>

 

여기에 등장한 것이 범선이라고 불리우는 바람을 이용한 배다. 널리 알려진대로 지중해 범선의 발전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삼각범의 채용이었다. 삼각법은 원래 오만 해에서 기원했고, 이슬람 문명이 차용했으며, 또 이것이 지중해에 전달되었다. 포르투갈이 삼각범을 제일 먼저 받아들인 것도 이슬람의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역풍이 불면 멈춰야 했던 사각범에 비해 삼각범의 돛의 방향을 바꾸어 역풍에도 전진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유럽인들은 보조 돛을 만들어 순풍일 때는 사각범으로 큰 동력을 얻었고, 역풍일 때는 사각범을 올리고 삼각범을 내려 조금씩 나아가는 방법을 택했다.

 

<삼각돛의 항해, 출처: 해양과학기술원>

 

삼각범과 함께 북유럽의 배 코그(cog)선에서 활용되던 이어짓기와 중앙키의 도입도 원양 항해를 가능케 한 요인이다. 판자를 겹쳐 이어붙여 방수성을 크게 개선했고, 선미에서 방향을 바꿀 때 쓰이던 키를 배의 중앙으로 가져와 조종의 용이성을 크게 높여주었다(성공의 키를 쥐고 있다라고 할 때 키는 열쇠가 아니라 배의 키를 의미한다). 즉, 유럽의 범선은 스스로 창조해냈다기보다, 다른 문화권의 기술들을 차용해 조립한 것으로 봐야 한다. 

 

초기의 범선들은 크기가 크지 않았다. 막연히 큰 배가 유리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위험한 사업이어서 처음부터 크기를 키우며 투자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큰 배는 연안에 가까이 붙이기에도 불리한 점이 있었다. 바스톨로뮤 디아스나 바스코 다가마의 배들도 30~50명의 선원을 수용할 수 있는 작은 크기였다. '발견'과 '탐험'의 시대에는 작은 배들로 충분했지만, '정복'과 '교역'의 시대인 16세기 이후는 달라진다. 물건을 많이 실을 수 있어야 이윤을 크게 남길 수 있기 때문에, 배의 크기는 100톤에서 400톤, 혹은 750톤까지 비약적으로 커져 1천명의 선원까지 태울 수 있었다(한강 유람선이 280톤 수준). 하지만, 선박 기술의 발전과 해운 비용의 하락을 바다를 통한 세계의 소통의 주요 요인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해운 비용은 연간 1.2% 하락 수준에 머물렀고, 그나마도 선원에 대한 착취에 기반한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는 농업과 공업, 상업의 발전으로 물건의 가격이 큰 폭으로 내려갔고, 이를 교환하며 발생하는 가치의 크기가 대항해시대의 추동력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대항해시대라고는 하지만 항해술은 여전히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소위 '추측항법'은 바다 위에 부표를 던져 놓고 얼마나 빨리 멀어지는지를 측정하는 수준이었다. 1600-1635년 사이 리스본을 출발한 912척의 배 중, 60척은 곧바로 회항했고, 84척은 가는 도중 실종되었으며, 목적지에 도착한 배는 768척(84.2%)이었다. 1년 평균으로 한다면 매년 2-3척 꼴로 '대형 사고'가 났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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