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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

[대항해시대] 3장 - 근대 해양 세계의 내면 III

by 마고커 2022. 4. 4.


해적의 세계: 근대 자본주의에 대한 반질서

 

근대 초에 해적이 활개를 쳤던 기본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국가가 모든 바다를 다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국가 대신' 폭력을 휘두르는 집단, 다음에는 '국가의 지휘와 통제를 벗어나서' 폭력을 휘두르는 집단, 급기야는 '국가에 대해' 폭력을 휘두르는 집단으로 변모해 간다. '해적'이라는 넓은 범위 아래 사략선 업자, 버커니어, 그리고 좁은 의미의 해적이 있다. 

 

사략선 업자(privateer corsaire)는 정부와 계약을 맺고 전시에 적선을 공격할 권리를 받은 사람을 말하는데, 근대 초에 제일 먼저 나타난 대규모 해상 폭력 현상이 바로 사략선이었다. 각국 정부는 무장을 갖춘 민간 선박에게 공식적으로 권리를 인정해 주어서 적국의 배를 공격하고 약탈하도록 부추겼다. 적어도 이 시기에는 사략선 업자들은 자국민의 배는 공격하지 않았는데, 대표적 인물이 영국의 프란시스 드레이크이다. 드레이크의 골든 하인드 호의 선원들은 카카푸에고 호로부터 약탈물 13통 은화, 8파운드의 금괴, 진주와 보석 상자를 옮겼다. 드레이크는 이 공로로 기사 작위를 받았고, 이 무자비한 해적은 영국의 국민적 영웅이 된다. 

 

작위를 받는 프랜시스 드레이크

 

버커니어(buccaneer)는 17세기 전반에 카리브 해에서 에스파냐와 에스파냐 식민지 선박들을 공격한 해적들을 말한다. 이들은 주로 서인도제도의 섬들에서 살아가던 프랑스계 개척민들이며, 특히 이스파뇰라 섬의 사냥꾼 출신들이 많았다. 버커니어란 말도 고기 훈제용 석쇠를 가르키는 프랑스어 '부캉'에서 비롯되었다. 에스파냐가 이들을 축출해 버리자 에스파냐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되었고, 1660년대에 이들의 해적 행위가 절정에 이른다. 이들은 잔인하기로 소문났는데, 버커니어 롤로네는 에스파냐 포로를 심문할 때 한 포로의 심장을 도려내어 다른 포로에게 먹이기도 했다. 헨리모건이라는 버커니어는 이마에 로프를 감고 조금씩 죄면서 눈이 튀어나오게 하는 울딩(woolding)이라는 잔인한 고문으로도 유명했다. 

 

사략선 업자와 버커니어가 활동 지역과 공격 대상이 정해져 있던 반면, 좁은 의미의 '해적'은 국적을 가리지 않고 어떤 배든 공격했다. 17세기말 버커니어 세력이 축소되기 시작하는데, 영국 해군이 이들을 공격하여 제해권을 확고히 장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8세기초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뒤 영국 해군의 수가 비약적(4만->1만)으로 줄자, 실직 선원의 수가 늘어났다. 곧 불황은 심해지고, 선원의 급여는 절반으로 떨어졌으며, 보급은 열악해지고 선상기율은 더 엄해지는 해적이 늘어나기 딱 좋은 상황이 된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아시엔토(에스파냐 식민지에 노예를 독점 공급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은 영국은 굳이 스페인을 공격할 필요가 없었다. 해적은 이제 도움이 아닌 방해가 되었지만, 드넓은 바다에서 이들을 소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때부터 영국의 깃발을 단 해적선이 영국 동인도 회사를 공격했는데, 바르솔로뮤 로버츠, 블랙비어드 등 전설적인 해적의 극성기였다.  

 

영국정부의 해적에 대한 사면령은 큰 효과가 없었고, 영국군은 해적을 완전 소탕하기로 한다. 역설적으로 이것은 해적 무대의 확산을 가져왔다. 다수의 해적들이 북미 해안, 서부 아프리카 해안지역으로 옮겨왔고, 마다가스카를 중심지로 인도양까지 무대를 넓혔다. 사실 인도양에서도 먼저 장악한 포르투갈 선박을 대상으로 영국과 네덜란드 사략선의 해적질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고, 때때로는 무굴 제국 황제 아우랑제브 소유의 선박들도 공격당했다. 유명한 해적 윌리엄 키드는 사략선 선장이자 해적선 진압 업무를 부여받았으나, 스스로 해적이 되어 금괴를 강탈했다. 아우랑제브가 이에 대한 책임을 묻자, 영국은 키드를 체포하여 처형한다.

 

18세기초가 지나자, 바스솔로뮤 로버츠의 패배를 시작으로 해적의 수는 급감한다. 카리브해에 32척의 해적선이 많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 위험은 작지 않았다. 바스솔로뮤 로버츠는 4년간 400척 이상의 배를 나포하였고, 에드워드 로우와 블랙비어드는 140척의 배를 나포했다고 알려진다. 

 

악명과는 달리, 생활 여건이 지극히 안 좋았던 선원들이 차라리 해적이 되고자 했다. 일이 별로 없어서 한가하게 지낼 수 있고, 재산은 재분배되어 누구나 큰 차이가 없으며, 특히 음식이 풍족한 유토피아 같은 삶이 이들에게 주어졌다. 200톤급 배에 13-17명이 일했던 상선과 달리 80명이 일하며 노동량이 줄었고, 법 밖에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내부에서는 더욱 엄격한 자신들의 법을 만들었다. 모든 선원은 동등한 표결권을 가지고, 전리품 목록에서 공평한 몫을 요구할 수 있었다. 도박을 해서는 안되었고, 소년이나 여자를 배에 대려와서는 안되었다. 전투 중에 탈주하는 자는 처형하거나 무인도에 버리고, 배 안에서는 서로 때려서는 안되며, 언쟁이 있을 경우 육지에 내려서 칼이나 권총으로 먼저 피를 내게 한 자가 승리하는 것으로 하였다. 해적선의 가치는 평등주의와 민주주의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들 자신이 일반 선박에서 가공할 폭력에 시달렸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폭력적인 위계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규칙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아서, 처벌받는 사람을 벌거벗겨서 둘러싼 사람들이 뾰족한 물건으로 찌르는 '스웨팅'이라는 처벌도 있었고, 피 흘리는 사람을 바퀴벌레가 우글거리는 통에 집어 넣어 시달리게 하기도 했다. 특히, 선박을 나포했을 때, 선장을 비롯한 지휘자들에게는 상처를 내고 소금을 뿌리는 등 많은 고통을 주기도 했다. 

 

'캐러비안의 해적'처럼 낭만적인 해적의 이미지가 남아 있는데,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이 이러한 이미지에 많은 기여를 했다. 많은 선원들이 무인도에 버려지고, 앵무새를 기념물로 가지고 다녔으며, 롱 존 실버처럼 외다리 선원도 있었지만, 이들이 공격하는 대상이 '보물'이 아니라 일반 화물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게다가, 금은 보화를 얻는다 하더라도 즉시 써버리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보물을 묻고 지도에 표시하는 일들은 일어날 수 없었다. 이들에 대한 낭만화는 일종의 주류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반질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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