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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

[대항해시대] 2장 - 세계와 유럽의 조우 II

by 마고커 2021. 11. 28.


16세기 급격히 증가하던 아메라카와 유럽의 교역은 1) 유럽의 은 수요 감소와 이로 인한 채산성 약화 2) 유럽 경제 불황으로 인해 뚜렷이 감소한다. 포르토벨로의 정기시 규모가 축소되었고, 대서양 왕복선도 1640년대 연 75척 수준에서 1660년대 30~35척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카리브의 해적들이 극성을 부린 것도 그 배경에는 이 불황이 있다. 

 

불황은 17세기 말부터 회복되다가 18세기가 되면서 활기를 되찾았다. 단, 수출 상품에는 카카오와 같은 신상품이 포함되고, 담배의 중요성이 커지며 구성이 달라지긴했다. 은 수출도 조금씩 증가했고, 무엇보다 1695년 브라질에서 금광이 개발되며 금 수출이 활기를 띈다. 하지만, 더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은 유럽에서 아메리카로의 수입품으로 농기구와 종이, 행정 용품이 늘어나는 등 아메리카는 식민 사회에서 자체 충족적 사회로 변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플랜테이션이 크게 늘고 이를 위해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간 세계 식민지 분할선, 출처: 대항해 시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돌아오자 교황은 이 곳을 에스파냐에게 주고 싶었다. 카보베르데 해역에서 서쪽으로 100리그 떨어진 지점에 북극에서 남극으로 곧게 그은 구획선을 설정하고, 이 선의 서쪽에서 발견한 육지는 에스파냐에 속한다는 교서를 발표한다. 에스파냐의 경쟁국인 포르투갈은 에스파냐와의 협상를 통해 이 선을 좀 더 서쪽으로 옮기며 브라질의 지배권을 확보했다. 브라질은 아시아로 가는 중간 항로 정도의 역할이었으나, 이 지역 주민의 저항이 적어 1540년대 이 곳을 식민지화하기로 한다. 인력 부족을 메우기 위해 흑인과 인디언 노예를 많이 도입한 것이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의 시초가 된다. 

 

아프리카 노예의 도입에는 금광의 발견도 중요한 요소였다. 바이아와 미나스제라이스에서 발견된 금광의 채굴량은 다른 모든 생산지의 산출량을 압도했는데 브라질 국가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해안 지역과 북동부 지역에 한정되었던 식민 거류지가 금광업을 계기로 서쪽 내륙 지역 및 남동부 지역으로 확대 되며, 경제 및 정치 행정 중심지로서 바이아 대신 리우데자네우리의 중요성이 더 커지면서 이 도시가 수도가 되었다. 

 

유럽인이 도착한 초기에는 기존 경제와 문화가 파괴되고 원주민들은 피폐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으며, 모국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전형적인 식민지 경제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2-3세기의 지속적 발전이 거듭되는 동안 인디오 문화와 에스파냐 문화가 합쳐진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고 사회, 경제적으로도 독립성을 확보해 나갔다. 

 

북아메리카의 사정은 이와 또 달랐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주로 탐사한 북아메리카는 금이나 향신료가 나지 않고 아시아로 가는 항로가 발견되지 않아 상대적으로 국가 입장에서는 매력적이지 않은 땅이었다. 정부를 대신해 개인 업자들이 교역을 주도하였고, 대구어업이나 모피(영화 레버넌트를 떠 올리면 된다)가 그 대상이었다. 영국은 인구 과잉 상태여서 적절히 인력을 해외로 유출 시킬 필요가 있었는데, 수백명 단위의 이주가 이루어진 남아메리카에 비해 무려 30~70만 사이의 인구가 영국으로부터 유입되었다. 게다가, 남녀가 같이 이동하게 되어 인구는 급속히 늘어 1790년대에는 300만명으로 늘어난 것으로 추산된다. 남아메리카에서 원주민과의 혼혈인 매스티소가 늘어난 것에 비해, 북아메리카에 순수 백인 혈통이 여전히 많은 이유기도 하다. 인디언들은 너무 소수여서 피지배 노동층으로 활용하기에 부족했고, 유럽에서 계약제 노예를 들여오다 곧 흑인 노예 노동력을 대규모로 유입시킨다. 기틀이 마련된 19세기 또다시 6천만에는 이르는 대규모의 유럽인구 유입이 있었고, 이들이 서쪽으로 이동하며 '서부시대'를 거치고 최종적으로 미국가 캐나다가 형성된다.

 

현재의 캐나다 퀘벡지역에 도착한 프랑스인들은 늦가을과 초겨울의 인디언 섬머(일시적으로 따뜻한 기후)를 오해해 겨울을 나다가 추위와 기근, 괴혈병으로 많이 죽었지만, 프랑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해 더 많은 프랑스인을 보낸다. 비교적 무난하게 정착한 영국에 비해 프랑스는 지속적인 대결 속에서 북아메리카에 남았다. 대결구도에 있던 휴런족과 이로쿼이족 사이에서 휴런족을 지원하며 이로쿼이족을 적대시하였다. 프랑스와 교역하던 휴런족은 농업문화를 발전시켰으나, 창궐한 괴혈병의 원인을 예수회 사제들로 지목하며 이들을 추방하고 싶어했다. 여전히 교역을 원했던 휴런족은 차마 그렇게까지는 못했지만, 전염병으로 인해 많은 인구를 잃는다. 이 과정에서 친기독교, 반기독교 부족으로 나뉘게 되고 일부 부족들은 프랑스에 등을 돌리며 이로쿼이족과 새로운 동맹을 맺었다. 충격적으로 휴런족은 이로쿼이족에 패배했으나, 이에 프랑스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이로쿼이족을 제압한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이주한 미국과 달리, 특이하게도 퀘백지역은 별도 유입 없이 수천명의 초기 프랑스인들이 번성하며 현재 650만까지 늘어났다. 17세기초 수천명이었던 인구가 50년만에 5만까지 늘어난데 비해, 캐나다 인디언은 감소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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