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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부스러기

[드라이브마이카] 바냐 아저씨

by 마고커 2022. 4. 4.


22년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에 19년 '기생충'에 이어 아시아 작품이 후보로 올라 주목을 받았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카'. 대사를 먼저 쓰며 시나리오를 완성해 나가며, 봉준호 감독에게 '사람의 마음에 도달하게 하는 과정을 체험하게 한다'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최근에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스파이의 아내'에 각본으로 참여하기도 했고, 국내에서는 '아사코'를 통해 많이 알려졌지만, 대중적으로 흥행한 작품은 없어서 생소한 이름이었다. 봉준호 감독이 엄청 좋아하는 감독이었고, 지난 부산 국제 영화제에 자청해서 대담을 했을 정도.

 

 

쓰나미 피해를 입었던 센다이 출신 남녀를 다룬 아사코도 그렇고, 하마구치 감독은 상실한 이들의 회복에 관심이 많은 듯하다. 명망있는 연극배우인 가후쿠는 아내 오토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날을 보내는 듯 보인다. 오토 역시, 가후쿠와의 섹스 이후 떠오르는 이야기들을 각색하며 방송가에서 인기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후쿠는 오토가 매 작품의 배우들과 바람을 피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오토에게 아무말 하지 못하는 건, 그로인해 오토와 관계가 틀어지는 것은 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려 40분 동안의 서두에서 오토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히로시마 국제연극제에 디렉터로 참여하게 된 가후쿠는, 각국에서 모인 배우들과 함께 체홉의 '바냐 아저씨'를 무대에 올려야 한다. 연극제 측에서는 다소 이상한 규정 때문에 운전을 직접할 수 없다며, 20세 초반의 여성 운전자를 소개해 준다. 여기에 아내와 바람을 피웠던 다카츠키까지 연극제에 참여하면서, 그들이 그들의 인생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들이 밝혀진다. 

 

영화의 두 가지 주요 공간인, 차 안과 무대 위. 차는 이동의 수단이기도 하지만, 차 안에 있는 사람끼리 어쨌든 이야기를 나눌 수 밖에 없는 공간이기도 하다. 운전수의 뒷자리에 앉게 되면 위계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보조석으로 옮겨오게 된다면 '당신과 이야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라는 신호가 되기도 하고. 운전수 미사키와 가후쿠가 그랬다. 미사키는 다카츠키가 거짓말하지 않음을 증언하고, 가후쿠와 미사키는 과거를 고백한다. 어쩌면 무대 위도 비슷할 지 모른다. 그들은 연습과 훈련에 의해 대사와 감정을 교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후쿠의 지도 방식은 다르다. 아무 감정 없이 50번 이상 대본 리딩을 하여 대사를 체화시킨다. 대사가 몸에 익은 이상, 무대에서 상대 배우의 감정을 맞이 하게 되면, 대사는 신경 쓰지 않고 감정에만 반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남을 위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며, 둘은 미사키의 고향 훗카이도에 다녀오기로 한다. 그리고, 바냐아저씨에 소냐의 대사. "우리 시련을 견디며 살아요. 그리고 정직하게 죽는 거에요. 저 세상에 가면, 우리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가. 얼마나 슬픈 일생을 보냈는가 모조리 말씀 드려요"

 

내 평점: ★★★★☆

 

체홉의 '바냐아저씨'

 

하루키가 '어디까지가 내 글인지 모르겠다'며 극찬했다(왜 극찬인지는 잘...)는 것은 드라이브마이카가 다른 하루키의 소설, '셰라자드', '기노' 외에 체홉의 희곡 '바냐아저씨'가 믹스업 되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굳이 왜 '바냐아저씨'일까도 하지만, 감독이 이 영화를 택하면서 한 일이라고는 '바냐아저씨'를 읽고 또 읽는 것 뿐이었다고.

 

바냐는 예술과 학문의 세계를 동경하지만, 막상 뛰어들지는 못하는 숲 속에 어머니를 모시고 들어가 사는 노총각. 대신 예술대학의 교수로 있는 매형을 지원하며, 매형이 언젠가 걸작을 만들어 내길 기대한다. 그러나, 매형은 예술보다는 돈, 여자만을 밝히는 허세충이라는 것을 알게되는데, 매형의 방문 목적조차 숲을 팔아 주식을 사려고 한다는 것도 깨닫는다. 분노한 바냐의 총알은 매형을 빗나가고, 숲에 남은 바냐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며 펑펑 운다. 이를 위로하는 것이, 위에서 언급한 소냐의 대사. 영화에서는 유나의 한국어 수어로 표현해, 더 깊은 울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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