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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

[대항해시대] 2장 - 세계와 유럽의 조우 I

by 마고커 2021. 11. 14.


에스타도(Estado): 포르투갈의 해외 거점 제국

 

유럽의 끝에 있어서 팽창하기 좋았다는 포르투갈에 대한 오해가 있다. 생각보다 포르투갈은 강국이었고 수세기동안 이슬람 국가들과 접촉해서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다. 이슬람을 몰아내려는 생각도 많았지만, 금과 말라케타 같은 향신료 교역을 벌이기도 한 동시에 대서양과 지중해 세계의 경계에서 제노바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자본들이 유입되기도 했다. 레콩키스타에 참여했던 몰락한 기사들이 부르주아 계급의 시대에 택한 것 중 하나가 바로 해외 모험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바스코 다 가마 이후 중세 이래의 꿈이었던 인도 항해가 가능하게 되고, 포르투갈은 아시아 해양 세계로 진입해 들어갔다. 그런데, 이미 아시아와의 교역은 지중해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나? 해당 지역은 이슬람의 세력 안으로 편입되어 있었고, 포르투갈은 희망봉을 돌아가는 과정에서 무력으로 거점들을 편입하면서 기독교권의 숙적인 오스만 제국에 타격을 가하고자 하였다. 인도 고아를 세력 안에 편입 시키면서 레반트로 향하는 향신료 무역을 지배해 온 구자라트 상인을 통제하게 된다. 스리랑카와 말라카 지역에 연결망을 구축하는 한편, 동아프리카의 해안 도시들까지 세력을 넓히며, 1571년에는 아프리카 소팔라와 나가사키 사이에 40여개의 상관과 요새들을 확보한다. 주로 후추와 향신료를 무역했는데, 그 수익은 89%~152%에 달했다고 한다. 그 양도 어마어마해서 매년 7~8척의 배들이 3천톤의 향신료를 들여왔고 이는 전세계 생산량의 1/3에 해당했다. 

 

포르투갈의 해외사업은 경제적 측면과 군사적·외교적 측면이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고, 중세적인 사제 요한 전설이 국가 정책의 중요한 참고 사항이 되었다. 아덴 점령에 실패하며 홍해를 통과하는 이슬람 교역을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었지만, 위협을 느낀 이집트의 공격을 훌륭히 격퇴해냄으로써 무력 지배권을 공고히 할 수는 있었다. '군주 자본주의' 성격을 갖고 있어, 국가주의 방식의 거래와 사개인 거래가 함께 이루어진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아시아에 거주하는 포르투갈인은 7천명정도에 불과했고, 선박도 수십척 수준이었다. 즉, 포르투갈의 상업망이라는 것은 아주 광활한 지역에 몇 개의 점을 소유한 수준에 불과했다. 실상을 보면 아시아 일부 지역에서 약탈로 수익을 올린 것에 가깝다고 할까. 

 

이런 포르투갈의 사업도 위기를 맞이하는데, 16세기 중반 널리 퍼진 기근으로 아시아 경제 자체가 불황기로 접어 들었다. 오스만 제국은 홍해 함대를 창설해서 인도양 서쪽의 포르투갈 식민지를 공격했고, 이를 통해 포르투갈의 압박을 받던 인도네시아의 아체가 오스만 제국과 협력하고, 모로코 남부에서는 기독교 세력에 저항하는 지하드(성전)가 벌어졌다. 포르투갈은 인도양 세계 이외에 브라질과 북아프리카까지 사업을 벌려 놓는 '과잉 패창'으로 수준을 유지하기가 무척 어려워졌다. 

 

이에 대한 대안은 국왕의 사업으로 이루어지던 것의 민간이앙이었다. 개인업자들은 주로 봉사 귀족(국가 업무를 수행하는 귀족)이었는데, 이들은 중국과 일본까지 손을 뻗게 된다. 중국에서는 내부에 성채를 건설하겠다는 무모한 생각으로 배척당했지만, 일본에서는 첫 접촉부터 환영을 받았고,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며 총기도 전해주고 기독교도 전파한다. 중국과의 관계는 좋지 않았지만, 당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중국-일본 사이의 무역을 대리함으로써 일본, 중국, 인도네시아, 인도 연안, 이란, 오스만 제국 연안 일부, 동아프리카에 이르는 넓은 세계가 포르투갈 해상 체제의 구성요소가 되었고, 이를 통칭하여 '에스타도 다 인디아(Estado da India)'라고 불렀다.

 

1580년대 이후, 여러 교역로의 수익성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영국과 네덜란드의 공격으로 호르무즈와 서부 벵골의 후글리 등 거점을 잃으면서 포르투갈의 에스타도는 저물기 시작한다. 네덜란드는 아무 곳이나 공격하는 지경이었고, 여러 거점들이 네덜란드에 넘어갔다. 포르투갈의 영향력이 줄어든 곳에는 영국과 네덜란드 상인들이 몰려 온다.

 

제국과 플랜테이션: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화

 

유럽의 아메리카 이주는 아시아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아시아를 교역의 대상으로 봤다면, 아메리카는 지배의 대상이었다. 전염병으로 인해 아메리카의 인구는 급격히 줄었고, 그 자리를 유럽의 탐험가와 거류민들,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 인도와 중국의 쿨리, 그리고 산업혁명 이후로는 유럽인 이주자가 몰려 들었다. 

 

전반적으로 1750년 이전에 유럽인의 '통치 지역'이라고 할 만한 곳은 많지 않았다. 즉, '에스파냐령 아메리카'라는 식의 표현은 사실 왜곡된 표현으로, 중부멕시코와 칠레, 카리브 해의 몇몇 섬들, 북아메리카의 퀘벡부터 조지아에 이르는 연안 지역, 브라질 해안 지역 정도에 불과했다. 나머지 지역들은 영토에 속하지만 실상은 고립지역에 가까웠다.

 

아메리카를 바라보는 성격도 나라마다 다르긴했다. 포르투갈이 상대적으로 '상업' 지향적이었다면 에스파냐는 처음부터 '정복'에 무게가 실렸다. 포르투갈이 이미 자리잡고 있던 아시아에서 군사정복을 할 수 있던 여건이 아니었던 탓이었다. 에스파냐가 카리브해에 도착한 이후로 마을마다 불을 지르고 도살장의 양들처럼 원주민들을 죽여서 거의 절멸 상태로 만들었다. 이렇게 죽은 사람들이 1,500만명에 이르렀다고 하는 증언도 있는데, 그 실상이 10배로 부풀려졌다 해도 원주민들에게 공포를 심어 주기에는 충분했다. 이들의 목적은 금채취에 있었는데, 이사벨라 여왕의 강제 노동 허가 칙령에 따라 원주민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했다. 1503-1510년 사이에 19톤의 금이 에스파냐로 빠져 갔고, 원주민 마을들을 절멸했다. 

 

<흑색 전설(Black Legend), 출처: Wikimedia.org>

 

에스파냐 침략자들이 처음 도입한 체제는 가혹한 조세와 조공에 기반한 '엔코미엔다'였다. 문제는 왕은 멀리 있었고, 지배자는 가까이 있었다는 것이다. 지배자는 가압적으로 인디오들을 수탈했고, 이는 인디오들의 '소유' 관련한 라스카사스와 세풀베다의 논쟁으로 이어졌다. 라스카사스가 인간의 자연적인 권리인 소유권을 이방인이 빼앗을 수 없다고 인디오의 편에 섰다면, 세풀베다는 인디오는 인간같지 않으므로 에스파냐가 지배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인디언의 수호자'라고 불린 라스카사스는 모순되게도 인디언을 보호하기 위해 흑인 노예를 도입하자고 주장한다. 착취로 인해 인구가 줄자 에스파냐는 지배자의 대물림을 규제하기로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부역의 의무가 고용의 형태로 바뀐 '아시엔다'라는 대농장 체제로 바뀐 것 뿐이었지만, 문화적으로는 원주민 공동체를 해체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한편으로는, 에스파냐의 이주자는 적고 원주민은 많았으므로 인종적 혼합이 많아졌다. 오늘날 대부분의 멕시코인들은 스스로를 메스티소(스페인과 원주민의 혼혈)로  간주한다. 멕시코는 에스파냐어 문화가 주축이지만, 일부 인디언 문화가 혼합되어 라디노 문화가 되었고, 후에 흑인 노예들이 들어오자 아프리카 문화가 혼합되어 크레올 문화가 만들어진다. 아프리카 노예무역이 끝난 뒤에는 인도인들이 계약제 노예로 대규모 이주하여, 곳곳에 인도 문화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에스파냐는 아메리카 식민지가 모국 경제에 기여하도록 통제했다. 식민지에서는 모국 경제가 생산하지 못하는 것을 생산하고 모국 상품을 수입해서 소비하며, 외국 상인들이 식민지에서 직접 교역하는 것을 금지하고 세비야 혹은 카디스에서 식민지 상품을 구매하도록 강제했다. 독점교역을 주관하는 무역관은 교역과 선박 운행을 통제하고 거기에 대한 조세를 거두어서 국왕에게 넘기는 역할을 했다. 

 

에스파냐에서 출발한 선단은 양단으로 나뉘어 하나는 멕시코로 다른 하나는 남미 북부 지역으로 갔다. 멕시코로 선단은 끔찍한 멕시코만의 여름을 피하기 위해 7월에 카디스를 떠나 카리브해에 8월 중에 도착해서 베라크루스에 9월 중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겨울을 나며 비즈니스를 하고 5, 6월에는 아바나로 간 뒤 귀국길에 오른다. 남아메리카로 간 선단은 3-5월 사이에 에스파냐를 떠나서 카르타헤나에 6월에 도착했다가 두 달 후에 파나마 지협에 도착한다. 놈브레 데 디오스와 포르토벨로의 정기시(fair)에서 상품과 은을 구매하고, 겨울을 난 뒤 여름에 귀국길에 올랐다. 이 두 선단이 교역의 85%를 독점했으며, 해적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갤리온선 전함이 이들을 에스코트 했다. 1520년대에 약 100척의 배가 대서양을 횡단했고, 16세기 말에는 150~200척의 배가 운항했는데, 배의 크기가 커져 수송량은 실질적으로 4배로 늘어난 것이었다. 

 

아메리카로의 주요 수출품은 가축과 수지였는데 그만큼 목축 문화가 넓은 평원에서 발달했고 줄어든 원주민을 가축들이 대체했다는 비극적인 사태를 말해준다. 유럽으로의 수입품은 설탕과 목재 등이었다. 노예제 플랜테이션의 확산과 함께 설탕의 교역이 늘어났고, 특이하게도 유럽에서 품귀현상이 일어나 수송효율이 좋지 않은 목재 수입도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19세기 염료 혁명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천연 염색제인 인디고와 코치닐의 유럽 수입도 증가했다. 유럽인들이 처음 아메리카에 왔을 때는 금과 은을 열심히 약탈하고 보냈지만, 이는 금세 끝나고 본격적으로 은광(포토시 은광)을 개발하여 은을 채굴했다. 이중 적지 않은 양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가며 유럽이 아시아의 문호를 여는 수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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