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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

[대항해시대] 1장 - 세계의 팽창, 세계의 불균형

by 마고커 2021. 10. 18.


총균쇠, 사피엔스 등 인류의 기원과 차이를 잘 정리한 책들은 많다. 이런 빅히스토리까지는 아니지만, 서양의 근대사를 아주 집요하게, 그리고 총균쇠 수준의 가독성으로, 편견없이 담아낸 책이 있다. 바로 서울대 주경철 교수님의 '대항해시대'로 포르투갈, 스페인부터 시작된 유럽의 해상 팽창을 배경 및 전개, 그리고 문화의 변화사를 담아내고 있다. 주요 포인트만 기억하고 넘어가기에 아까운 명저라 챕터마다 정리하여 기록해 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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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500년전, 유럽은 곧 세계를 제패할 것처럼 생각된다. 과연 그랬을까?  십자군 원정과 이베리아반도의 레콩키스타는 정체상태였고, 전세는 역전되어 오토만 제국이 유럽을 향해 진격해 오고 있었다. 중국 명나라는 대규모 함대를 아프리카로 파견했고, 화교들은 해상 무역을 통해 부를 쌓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북서쪽에서는 송가이제국이 도시의 상공업자들과 이슬람 학자들 주축으로 발전하고 있었고, 남아메리카에서도 잉카 제국과 아즈텍 제국이 번성하고 있었다. 근대초, 세계 많은 지역들이 팽창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많은 지역에서 잠재력을 가진 세력이 있었음에도 정체된 유럽이 근대를 지배할 수 있게 되었을까? 최종적으로 희망봉을 돌아온 이들은 중국의 정화함대가 아니라 유럽인들이었다. 

 

15세기까지 해상 교역은 지중해가 아닌 인도양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최장 루트는 소말리아의 아덴만에서 시작해 중국의 광둥까지 연결된 항로였고, 페르시아 상인들, 아랍 상인들, 중국 상인들을 중심으로 아시아 각지에서 상업 세력들이 성장했다. 아프리카 동쪽 해안은 페르시아와 아랍의 상인들이, 아라비아해에서는 인도 구자라트의 상인들이 주도권을 가졌다. 남인도 지역은 인도 상인들이 있었고, 중국 선원들은 별자리 관찰과 나침반 사용을 병행하여 동남아시아 각지를 항해했다. 아덴, 캄베이, 츠통, 말라카 등이 이때부터 성장했으며, 그 중 말라카는 정치, 군사보다는 상업 활동을 유치하여 크게 번성했다. 이처럼 아시아 지역은 문화적으로 극히 다양했으며 비동질적이었고, 상인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출처: 대항해시대, 주경철>

 

중국이 유럽보다 훨씬 앞서 있다는 것은 아래 지도로 확인할 수 있다. 이 당시부터 중국은 아프리카가 남쪽으로 길게 뻗어 있다는 것을 인식했는데, 유럽은 아프리카가 동쪽으로 향해있으며 인도양은 고작 호수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정화의 함대로 대변되는 중국의 팽창은 15세기초 불현듯 사라진다. 

 

<출처: 대항해시대, 주경철>

 

명대초기에 절대적 황제 권력의 확립 문제를 놓고 황족 간에 치열한 골육상잔이 벌어진다.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했던 황족 연왕은 제2대 황제 건문제에 도전하여 승리하고 3대 황제 영락제로 즉위한다. 하지만, 건문제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해외에서 군사를 모으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돌았다. 정화가 해외원정의 이유로 걸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건문제의 행방을 찾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더 큰 이유는 확장 정책을 통해 명의 세력과 위엄을 확고히 한다는 것이고, 정화도 연인원 2.7만명을 동원하여 18만 5천km의 거리를 항해하게 된다. 

 

함대는 60여척의 대형 함선과 100척 정도의 소선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함대의 중심을 이루는 보선에는 각지의 지배자에게 전하는 황제의 하사물과 황제에게 헌상하는 화물을 싣게 되어 있었다. 보선의 길이는 무려 150미터, 폭은 60미터의 당시 최대 규모로, 이렇게 큰 배는 실상  전투에는 비효율적이어서 위용을 드러내는 목적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출처: KBS>

 

그러나, 중국은 북방이민족의 침략과 내부의 농민 봉기로 해상 팽창 정책을 곧 포기하게 된다. 해상 팽창을 주도했던 환관 세력은 유교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관료들에 밀렸고, 관료들은 북방 베이징으로 천도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중국은 농업에 절대적 가치를 두는 고립주의로 나아갔다. 

 

정부차원의 해상 활동은 중단되었지만, 민간인들의 활동이 갑자기 단절되지는 않았다. 즉, 민간에서의 해상 활동은 일어났지만, 중국과 유럽의 차이를 만든 것은 국가 차원에서 이들을 지원했느냐의 여부였다. 자바의 팔렘방, 필리핀 마닐라 지역에 고립되었던 화교들과 푸젠성 주민들은 은밀히 교역활동을 하였지만, 명나라 정부는 이들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았다. 마닐라에 방문하는 중국의 배가 늘어나고 루손 섬에 거주하는 중국인이 2.5만명까지 늘어나자 에스파냐인들은 1603년 중국인 대부분을 학살한다. 놀랍게도 푸젠성 주민들은 다시 필리핀으로 건너가 20년도 안되어 3만명의 화교가 생겨났지만 1639년 에스파냐는 또 다시 2만명의 중국인을 학살한다. 중국 정부는 이 상황에서도 화교의 안전을 방치했다. 결국 중국 상인들은 스스로의 네트워크를 만들고 운용하기보다 다른 사람이 만든 체제에 참여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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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란 말은 지금은 전 지구적 의미를 갖고 있지만, 폴 케네디에 따르면 불과 200년전까지만해도 전체 지역의 35% 정도, 즉, 유럽과 북아프리카, 아시아 정도를 의미했다. 1800년대 후반 세계는 67%가되었고 20세기 되어서야 84%가 된다. 중요한 건 84%가 아니라 35%다. 눈사람 만들 때 힘든 것이 조그만 눈덩이를 먼저 만드는 것이듯 수십세기에 걸쳐 35%였던 세계가 불과 200여년만에 84%가 된 것이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로 떠난 1492년쯤 유럽이 이미 세계를 제패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16세기 중반까지 중국과 인도의 생활 수준은 영국과 유사하였다. 게다가 19세기의 유럽의 생활은 현재 아프리카의 80% 수준으로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세계 어느 곳에서나 빈곤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세계의 1인당 GDP, 1990년도 국제 달러 기준, 출처: 대항해시대>

1500년대 이후 유럽과 미국의 경제는 차이를 두기 시작했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미국 유럽의 경제 수준은 이전에 비해 20배 가까이 성장했는데, 중국은 6배, 아프리카는 3.5배 성장하는 데 그쳐 차이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즉, 1500년이 지나면 서유럽은 중국을 능가하였고, 18세기 이후 이 차이는 확고해진다. 

 

주경철 교수는 이것이 과연 사실일까라며 반문한다. 최근 연구들은 19세기초까지도 중국의 선진 지역은 유럽의 선진 지역가 비교해서 큰 차이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마르코폴로가 중국에 왔을 때 중국이 사치스럽고 진기하다는 인상을 받았고,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의 부에 놀라움을 표시했으며, 포르투칼 탐험가들이 아프리카 서해안의 잘 정돈된 마을을 보며 감탄했다고 한다. 즉, 불평등한 세계의 구조가 완성된 시기를 19세기초~20세기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중심은 여전히 15세기~18세기에 둔다. 1인당 소득은 유럽이 앞지르기 시작했으나 전체 경제 규모는 비교도 안되게 아시아의 우위에 있던 시기. 이 시기에 각 지역은 서로 조우하고 교류하고 충돌했으며, 적응했다. 그 과정에서 세계의 무게 중심이 아시아로부터 유럽과 북아메리카로 옮겨가기 시작했고, 일부 국가들은 패권을 차지한다. 

 

세계사를 다루는 학자들은 19세기초의 우위를 바탕으로 과거를 거슬러 올라간다. 애덤스미스를 비롯한 정치경제학자들은 서구사회의 산업혁명과 자본주의가 서유럽게 자리잡게 된 배경을 찾으며, 미개사회와 선진사회로까지 동양과 서양을 구별한다. 에드워드 사이드를 비롯한 일군의 학자에게서 다루어지는 '오리엔탈리즘'도 유사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토인비와 슈펭글러와 같이 전지구적으로 역사를 다루고자 하는 학자들도 있었으나 일시의 유행으로 그쳤고, 세계사는 다시 민족주의로 회귀한다. 

 

<13세기 세계 체제의 8개 순회로, 출처: 대항해시대>

 

세계 체제에서 본다면, 13세기에는 전체를 총괄하는 체제가 존재하지 못했고,여러 개의 중심세력들이 경쟁하면서 협조하는 가운데 상호 관련성이 증대하고 있는 정도였다. 15세기 초반에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긴 팽창기가 시작되었으며, 곧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가 대열에 합류했고, 15세기 중반이후로 아프리카와 유럽도 가세한다. 말하자면 세계체제의 경쟁은 중국에서 시작했으나 유럽이 패권을 잡은 것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유럽의 성장이라기보다 아시아의 쇠퇴현상이다.

 

인구 증가와 함께 인구당 생산성이 낮아지며 유럽과 중국은 다같이 곤란해졌으나, 하나는 식민지와 석탄으로 돌파하고, 다른 하나는 여전히 정체해 있는 대분기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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