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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가치 탐색

[인간의 가치 탐색] 지그문트 프로이트

by 마고커 2021. 7. 4.


지그문트 프로이트

 

1856년 현재 체코 지역(당시는 오스트리아령) 프라이베르크에서 출생하였고, 빈 대학의 과학부에 입학 했으나,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과 괴테의 '자연'에 영향을 받아 의학부로 옮겼다. 1885년에 파리에 유학하며 본격적으로 신경증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출처: 위키피디아>

 

인간의 행동양식을 심리 내적 욕구와 외부의 사회적 요구가 조화될 때는 문제 없지만, 조화되지 않을 때 정신적 질환으로 나타난다(심인성질환)고 간주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다. 무의식이 행동에 영향을 주고, 무의식적 갈등이 정서적으로 영향을 준다고 말하며, 그의 자유연상(일정한 기억들이 억압되어 있다가 의식 영역으로 뚫고 올라온다는 견해)과 꿈의 해석은 현재의 대화 치료로 발전한다. 그의 책들에는 성욕이 자주 등장하는데 인간 생활에서 주요한 동기 부여의 에너지로 보고 있다.

 

과학철학자 '칼포퍼'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실험이나 관측에 의해서 반증되지 않기(반증불가능성) 때문에 과학이 아니라기 비판하기도 한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문명, 사회 그리고 종교에 관련된 논문을 모은 책 '문명 속의 불만'은 문명의 제약과 본능의 요구의 대립 관계를 다루고 있으며, 종교가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문명화된 인간이 느끼는 죄의식의 근원은 무엇인지 밝히고 있다. 그 중 교재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 다루고 있다.

 

프로이트는 루가 복음의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라는 말의 논증부터 시작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야 한다. 나와 너무 비슷해서 그를 사랑하는 것이 곧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거나 나보다 훨씬 완벽해서 나 자신의 이상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경우는 쉽게 납득되겠지만 '이웃'의 정의에는 그러한 대상을 한정하지 않는다. 내 친구의 아들이 이웃이고 그가 재난을 당하면 내 친구가 고통을 느끼고 곧 나의 고통이 되므로 여기서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하지만, 이웃이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프로이트는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내 가족과 동등하게 대한다면 내 가족에게 부당한 처사이므로 잘못된 일이며, 내 사랑 중 그의 몫은 조금 밖에 되지 않으므로, 이성적으로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낯선 사람은 사랑 받을 가치가 없을 뿐더러 적개심과 증오까지 받아도 마땅한다고 말한다. 그 사람은 나에 대한 존중이나 사랑이 없고, 자신에게 이로우면 망설이지 않고 나를 해칠 것이다. 프로이트는 우리 본성을 에로스와 타나토스로 보고 있는데, 파괴적 욕망인 타나토스에 비추어 낯선 이가 자기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다면, 그는 나를 비웃고 모욕하고, 자신을 과시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가 아닌 '네 이웃이 너를 사랑하는만큼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으면 프로이트 자신도 이의를 달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내 이웃도 나처럼 자기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을 수도 있지만, 사랑의 태도, 즉 행동 양식은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윤리'는 그러한 차이는 무시하고, 인간의 행동을 '선'과 '악'으로 분류하고 있어, 아 치아기 제거되지 않는 한, 악에 절대적 이익을 주게 되므로, 이런 명령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으로 문명의 목적을 헤치게 될 것이라고 프로이트는 가정한다. 

 

'문명의 노력'의 실패

 

프로이트는 흉노족의 서진, 몽골제국의 확장, 십자군 원정 등의 예를 들며, 인간의 본래 모습이 '공격 본능을 발휘하기에 유리한 상황, 즉 평소에 공격 본능을 억누르는 정신적 억제력이 작용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공격 본능이 자연스럽게 표출되어, 같은 종족을 종족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야수'임을 폭로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문명은 '삶의 본능(에로스)'와 '파괴 본능(타나토스)' 두 힘 사이의 투쟁에서 형성된다. 성적인 힘 '리비도'의 전용으로 에로스가 자연으로부터의 안전을 도모하는 역할을 한다면, 타나토스는 공동체 형성에 저해가 되므로, 문명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며 타나토스를 억누르려 한다. 하지만, 본능적 열정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보다 강하기 때문에, 공격 본능의 표출을 억제하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물론, 법률조차도 이러한 본능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다고 보았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인간은 전적으로 선하고 이웃에 호의를 갖고 있지만, 사유재산 제도가 인간의 본성을 타락시켰다며 이 견해에 반박한다. 사유재산을 가진 이는 보유한 권력으로 이웃을 학대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고, 무산자는 억압자에 대한 적개심으로 반항하게 되므로, 사유재산이 폐지되고 모든 재화가 공유되면 인간들 사이의 악의와 적개심은 사라질 것으로 보았다.

 

프로이트는 이를 반박한다. 사유재산을 폐지하면, 공격 본능이 이용하는 도구 하나를 빼앗을 수는 있지만, 공격 본능이 악용하는 힘과 영향력의 차이를 바꿀 수 없고, 공격 본능의 본질을 바꿀 수도 없다고 보았다. 이를 테면, 재산 개념이 없었던 원시 시대에도 공격 본능은 거의 무제한으로 맹위를 떨쳤고, 사유재산이 아니더라도 성관계에서의 일부 남자들의 특권은 남자들 사이의 강한 혐오감과 적개심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을 예로 든다. 이 요인을 제거하려면 성생활에 완전한 자유를 허용하고, 그에 따라 가족을 폐지해야 하는데, 거기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문명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예상할 수 없다고 보았다. 특정 지역에 부동산 규제를 하면 다른 지역에 풍선 효과가 나타나는 것처럼, 공격 본능은 문명의 새로운 발달 방향을 따라 다른 형식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성향과 풍습이 거의 비슷한 이웃 국가들끼리 아주 사소한 차이로 공격하게 되는 것을 '사소한 차이에 대한 나르시시즘'이라고 표현한다.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경제력 차이, 북부독일과 남부독일의 종교 차이(루터파, 카톨릭) 등의 사소한 차이로 공격 본능을 발산할 수 있는 대상이 남아 있으면, 상당수의 사람들을 단결시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보았다(그런 면에서, 유대인들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골고루 박해 받았으므로 문명 발달에 이바지 했다고.. 프로이트도 유대인). 이런 공격 본능은 꼭 국가 단위에서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 사도 바울이 이교도를 배척하며 기독교 공동체를 꿈꾼 것이나, 게르만족의 세계 지배에 대한 야심을 반 유대주의로 표출한 것, 공산주의 문명 건설 과정에서 부르주아 박해가 일어난 것 등을 예로 든다. 프로이트는 소련이 부르주아를 말살한 뒤에 무엇을 이용할 지 걱정된다며, 어쨌든 사람들을 단결시키기 위한 다른 도구를 찾을 것이라며, 인간이 공격 본능을 단념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원시인은 (파괴) 본능에 제약을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훨씬 행복했지만, 그 행복은 우두머리에게만 국한되었다. 문명인은 행복해질 가능성을 일부 희생하고, 약간의 안전을 얻는다. 현재의 문명 상태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생활 설계도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수 많은 고통을 방치한다고 불평하지만, 그 불평으로 문명은 요구를 더 잘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변화한다는 점에서 프로이트는 동의하고 있으나, 문명의 본질 속에는 문명을 개혁하려는 시도를 방해할 장애가 존재한다는 생각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테면, '집단의 심리적 빈곤'이 그 예로써, 본능의 제한은 구성원들이 각오했지만, 지도자들이 집단 내에서 중요성을 잃으면 집단은 동요하고 와해되는 경우가 그러한 경우이다(일부 목사들의 일탈로 기독교도들의 일탈이 일어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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