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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가치 탐색

[인간의 가치 탐색] 로버트 스키델스키 -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

by 마고커 2021. 5. 23.


로버트 스키델스키

 

영국의 경제사학자 스키델스키는 케인즈의 수정 자본주의 이론을 옹호하면서도 케인즈의 예상이 틀린 몇가지 사례를 들며, 케인즈가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텔레스'의 계약을 했다고 비판한다. 더 이상 돈을 도덕의 통제하에 두는 건 불가능하게 되었고, 돈은 아무리 있어도 충분하지 않으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더 많은 돈이 아니라 '좋은 삶'이라고 말한다. 

 

<로버트 스키델스키, 출처: 민중의 소리>

 

케인즈가 틀린 이유

 

<우리 후손을 위한 경제적 가능성>에서 케인즈는 (자신의 이론이 나온 지 100년 뒤인) 2030년이 되면충분한 부가 증가해 하루 3시간, 일주일에 5시간 일하면(음, 5시간씩 3일 일하면 안될까?) 돈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건 사회적으로 큰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예견한다. 아울러, 경제적 걱정 거리에서 벗어나 여가시간을 어떻게 잘 쓸 것인가를 고민할 것이라고.

 

케인즈가 틀린 이유는 크게 세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일 자체의 속성 때문이다. 일이 즐거워서 몰입하는 경우가 많으며, 여가에 대한 두려움으로 일 중독에 빠지게 된다. 둘째, 1980년대 신자유주의 이후 심해진 불균형은 상대적 빈곤을 발생시켜 더 일하게 만들었는데, 통계에 따르면 그때 이후 노동시간은 더 이상 줄지 않고 있다. 셋째, 무엇보다 인간의 물질적 욕구가 충족될 수 있다는 말은 틀렸다고 주장한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다른 것을 원하는 '속물효과',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원하는 '밴드웨건 효과', 이를 합쳐 사람들의 선호가 가격에 직결되고, 가격에 따라 선호도가 올라간다는 '베블런재(Veblen Goods)'의 예를 들어, "분명한 것은 끝없는 욕구의 개별적 연원과 사회적 연원이 서로 얽혀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자본주의는 가두고 있던 관습과 종교로부터 끝없는 욕구를 해방시켰다. 새로운 시장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고, 계급사회가 끝나면서 지위 경쟁이 확대되며, '충분함'의 기준은 높아져 갔고, 각자의 집과 같이 가치를 비교할 수 없던 것들이 화폐화되며 비교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부의 한계와 좋은 삶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등하지 않은 '의자'와 '돼지'가 교환될 수 있다는 것에 늘 의심을 품었다. 인간의 모든 동기, 즉, 의사가 병든 이를 고치거나, 군인이 나라를 위해 싸우는 일들이 '화폐획득'이라는 것에 종속(의사가 진료비를 벌기 위해 돈을 벌고, 군인이 보수를 염두하며 싸우는)되는 것과 화폐에 '충분함'이라는 것을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을 의아해했다. 그리스신화 미다스 왕의 우화에서도 인간의 끝없는 욕구를 우려했고, 사마천은 사기에서 "사람들은 지혜를 다하고 능력을 다 쏟아, 그저 돈을 모으려고 애를 쓴다"며 비판한다.

 

이에 반해, 존 로크를 위시한 경험주의자들은 이런 아리스토텔레스를 최고의 맛이 사과인지, 자두인지, 호두인지 따져 물었을 것이라고 비판한다. 욕구는 주어진 것이며, '필요'가 객관적인 것이라면, '욕구'는 심리적인 것으로, 필요와 욕구는 서로 무관한 것인데, 충분함을 논한다고 불편해한다.

 

경험주의자들에서 이어진 경제학자들은 필수재와 사치재라는 것이 따로 있지 않고, 경험과 관습에 의해서 구분된다고 말한다. 배낭여행객에게는 이코노미석이 충분하지만, 기업가는 비즈니스석이 필요하다는 식이다. '얼마나 있어야 충분하냐'라는 물음에는 '얼만큼이면 좋겠어?'라고 되묻기도 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질문한 사용과 교환 가치에 대해서는 '효용'이라는 개념을 가져오며, 그저 어느 수준에서 교환할 지 '기술적 문제'만 남은 것이라 주장한다. 

 

스키델스키는 이들 경제학자들이 인간본성을 개조할 마음이 전혀 없으며, 더군다나 '좋은 삶'의 개념을 내다버렸다고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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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델스키는 주당 노동 시간을 줄이고, 상품 광고를 제한하며, 세계화의 흐름을 늦춰 자본의 이동을 제한하고, 소비세를 누진세로 바꾸자고 주장한다. 모든 정책에는 부작용이 있고, 우리가 경험한 바로는 그 부작용은 없는 이에게 제일 먼저 불어 닥치곤 했다. 나는 경제학자들이 머리에 뿔난 이들이 아니라고 믿으며, 그들 역시 많은 이들이 좋은 삶을 누리길 원할 것이라 믿는다. 스키델스키가 과연 옳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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