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모 레비
"ARBEIT MACHT FREI" - 노동이 자유롭게 하리라
민주 노조에서 쓸 법한 슬로건은 사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 적혀 있는 문구다. 독일이 유태인을 학살하기 위해 만든 이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는 그의 책 <휴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가스실로 보내질 인원 선발이 끝난 뒤, 그리고 매번 모욕을 당하거나 당하는 자리에 있어야 했을 때마다 우리를 가라앉게 만들던 그 수치심, 독일인들은 모르는 수치심, 타인들이 저지른 잘못 앞에서 의로운 자가 느끼는 수치심이다."
남은 생애에 수용소의 잔악함을 알리려 주력했지만, 그 자신도 저항하지 못하고 살아남았다는 수치심에 평생을 괴로워했다.
수용소에서 살아 남기
프리모 레비에 따르면, 수용소에서는 자살이 흔치 않다고 한다. 그 이유는 3가지로 1) 자살은 동물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 즉, 동물들은 죽음을 받아들이기는 해도 자살하지 않으며, 2) 하루 일과가 너무 빡빡해 죽음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3) 자살은 어떤 형벌도 덮어주지 못한 죄책감에서 생겨나는데, 수용소 생활의 힘겨움은 형벌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죄책감은 해방 후에나 나타나기 위해 2선으로 밀려나 있다고.
영화에서 보는 체제에 대한 저항은 수용소에서 쉽지 않다. 철저한 감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전에 영양 부족, 약탈, 그리고 여러가지 신체적 불편은 즉각적인 파괴력을 가지며, 파괴시키기 전에 마비시킨다고 말한다. 포로로 잡힌 소련 군대는 장교부터 병사까지 뭉텅이로 들어왔지만, 저항은 커녕 조직화도 못했다고 한다.
레비는 수용자들끼리 연대감을 갖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동료들을 구타한 기억을 의도적으로 지우는 카포(다른 유태인을 감시하도록 역할을 맡은 유태인들)를 제외하더라도, 그저 말을 들어주기라도 원했던 동료들을 외면한 그 자신도 도움이 필요한 처지였기 때문이다. 레비 자신도,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내가 먼저, 그 다음은 아무것도 없고, 바로 다음이 다시 나, 그러고 나서 다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레비는 다시 물 한잔에 관한 일화를 들려주는데, 작업장에서 우연히 물이 나오는 파이프를 발견한다. 몽땅 마시거나, 내일을 위해 남겨두거나, 친구 알베르토와 나눠 마시거나, 모든 동료들에게 조금씩 나눌 수 있었지만, 그는 알베르토와 나눠 마시기를 택한다. 다른 친구 다니엘레가 그 장면을 목격했고, 그 '물 한잔'은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장막을 치고 있다고.
살아남은 자의 수치
레비는 수용소에서 살아 남게 되자, 다른 사람 대신에 살아 남았다고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한다. 명백한 범죄 행위를 한 적도 없고, 누구의 자리도 빼앗은 적이 없으며, 누구를 구타한 적도 없고, 그 누구의 빵도 훔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용소에서 돌아온 후, 친구가 수용소에 대해 증언을 할 운명이라며 '신의 섭리'를 거론하자, 레비는 정말 부끄럽지 않은 지 다시 의심한다.
라거(수용소)에서 살아 남은 자들은 최고의 사람들, 선한 운명의 사람들이 아니며, 오히려 최악의 사람들, 즉, 이기주의자들, 폭력에 무감한 자들 등이 살아 남아, 본인은 무죄이고 그저 구조된 자들에 포함되었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정당화했다고 말한다. 프리모 레비가 보기에, 죽은 자들은 용기에도 불구하고 죽은 것이 아니라, 용기를 냈기에 죽은 것이고, 증언하고 있는 사람들은 '진짜 생존자'가 아니듯 했다.
레비는 인간종은 엄청난 고통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고, 그 고통은 어떤 비용이나 노력 필요 없이,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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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도생의 작금의 현실을 미루어 볼때, 수용소가 사회로 넓어졌다고 이야기해도 과언은 아닐 듯하다. 사회에서 원하는 바라를 열심히 맞추어 살아내고 있는 나는 그저 구조된 자들 중 하나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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