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의 부스러기

[파이트클럽] 라캉, 데이비드 핀처

by 마고커 2021. 9. 19.


잭은 거대 자동차회사의 리콜 조사원이다. 사고가 난 자동차가 리콜을 필요로 했는지를 조사하기 때문에 출장이 잦다. 그가 애용하는 제품은 호텔의 어메니티이고, 그의 집은 단정한 북유럽식 가구(이케아란 얘기)들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그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잭 본인이 더 잘 알고 있다. 조언을 받아 환암 환우의 모임에 참석했다가 호르몬제의 영향으로 가슴이 커진 밥의 품에 안겨 울게 된다. 오랜만에 숙면을 취한 밥은 더 많은 모임들을 찾아 위로 받지만, 자신과 동일한 목적으로 모임을 찾고 있는 말라 싱어라는 여성을 마주친 뒤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한다.

 

 

돌아온 집이 화재로 불타고 있어 당황하다가, 우연히(라고 일단 해두자) 만난 타일러 더든에 연락한다. 타일러는 자신을 한대 치라고 잭에게 부탁하고 둘은 폭력이 던져준 해방감을 만끽한다. 둘의 생각에 동조하는 파이트 클럽의 멤버들은 잭과 타일러를 보스러 여기며, 차츰 사회의 전복을 시도한다. 

 

라캉

 

'내 안의 본성을 해방시켜라'라고 단순히 해석해 버릴 수도 있는 이 영화는 사실 라캉에 바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라캉은 현실을 뜻하는 상징계와 인간의 주체적인 영역인 상상계의 싸움을 개인과 사회의 관계로 본다. 상징계는 상상계보다 앞서 상상계의 의미를 규정 짓는다. 쉽게 말하면, 개인은 스스로의 본성을 인식하기도 전에 사회의 틀 안에서 자신을 인식한다는 의미다. 즉, '나'라고 규정짓는 사회의 모습은 '본연의 나'가 아닌 '사회속의 나'가 되는 것이다. 사회속의 나는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므로 만족할 수 있는 상상계와 상징계 사이에서는 '결여'가 나타나는 데, 라캉은 이를 '욕망'이라고 본 것이다. 욕망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결코 만족될 수 없다. 여기에 더 나아가 실재계라는 개념까지 나오는데 여기까지 이해하는 데도 머리 아팠으므로 패스. 

 

영화에서 자본주의에 포섭된, 즉 이케아의 가구에 탐닉하는 잭의 모습은 상징계 안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밥의 품에 안겨 울면서 상징계가 자리잡기 전으로 잠시 돌아가지만, (좀 과한 추측이지만) 이를 공유하는 말라를 접하며 또 하나의 상징계에 갖혔다고 느꼈다고 볼 수 있다. 이 때 만난 타일러 더든의 직업은 지방흡입술로 빼낸 부자들의 지방으로 비누를 만들어 백화점에 납품하는 일. 자본주의를 다시 되돌리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타일러와 주먹을 주고 받으며 느끼는 만족감은 상징계에서 벗어나도라도 죽음과 합일하고자하는 '주이상스'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주이상스는 근본적으로 주체가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판단하는 라캉이 얘기하는 '환상의 횡단'을 뜻한다). 프로이트가 이야기하는 파괴적 본능인 '타나토스'와 유사할까?

 

결국 상상계의 나와 상징계의 내가 대립하는 마지막 순간에 잭은 '선택'한다.

 

데이비드 핀처

 

세븐, 벤자민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소셜 네트워크 등을 재밌게 봤으면서도 데이비드 핀처와 영화를 연결시키게 된 것은 파이트클럽 때문이었다. 폴토마스앤더슨과 함께 헐리우드 시스템에서 작가주의로 설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감독으로 간주되기도 하는데, 폴토마스앤더슨에 비해서는 확실히 대중적인 스토리텔링과 스타일리스트로의 면모를 보여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조지루카스의 ILM에서 시각효과 등의 작업에 참여했지만, 판타스틱 영화가 자신과 맞지 않음을 느끼고 광고계에 뛰어들어 성공을 거둔다. 이 덕분에 (흥행은 실패한) 에이리언3의 연출을 맡았고, 1995년 세븐을 내 놓으면서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인정 받는다. 소셜네트워크에서 왈도(저커버그의 친구)가 화내는 장면은 99번을 다시 찍었을 정도로 집착이 강하다고 한다(이동진의 영화당에서는 첫장면이라고 하지만 이 장면이 맞는듯). 소셜네트워크 촬영 시, 마지막 테이크를 작가인 아론 소킨에 맡기고 촬영장을 떠났는데, 아론 소킨이 첫 테이크에 만족하자, 주변에서 데이비드 핀처에게 절대 하나의 테이크만 주지말라며 똑같이 몇개 더 찍어 보내라고 할 정도였다고.

 

최근의 '나를 찾아줘'나 '맹크'에서처럼 오랜 시간이 흘러도 고른 연출력을 보여준다. 믿보감(믿고 보는 감독)이라 할 수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