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대항해시대] 3장 - 근대 해양 세계의 내면 II

by 마고커 2021. 12. 15.


선원들의 세계

 

먼 바다가 선원들에게 꽤나 위험하고, 비타민C 부족으로 괴혈병에 시달렸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1590년대 248명을 태우고 네덜란드를 떠난 배가 인도에 도착했을 때는 148명으로 줄어 있었고, 이 가운데 89명만이 네덜란드 텍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중 7명은 괴혈병으로 곧 사망하였다. 파이프를 문 마도로스의 멋진 모습은 실제와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선원 생활이 혹독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노동력을 파는 것은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의 가난한 젊은이들이었다. 선상에서는 기술을 요하는 직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주로 근육의 힘을 필요로하는 허드렛일을 했다. 고된 노동이 따르기 때문에 선원 모집 방식도 특이했다. 네덜란드에서는 여관주인이 선원들을 몰아다 주었는데, 생존해서 돌아와야 수익의 일정 부분을 받을 수 있었다. 즉, 돌아오지 못하면 한 푼도 못 받기 때문에 증서를 미리 할인해서 팔았고, 그 할인율은 무려 72%까지 이를 정도로 대단했다. 영국에서는 강제징모대를 운영하기도 해서, 젊은이들은 일부러 상처를 황산으로 태워 괴혈병처럼 보이게도 하는 등 자해를 서슴지 않았다. 알선업자들은 건강한 사람을 선장에 소개하고, 실제로는 무자격자들을 태우기도 했고, 그 중 일부는 알콜 중독자가 되기도 했다. 

 

장기간의 항해에 음식이 성할리 만무하다. 구더기가 나오기 십상이었고, 식수는 썩어서 악취가 심했다. 선원들은 노예와 다름 없었고, 거지들도 선원들보다 나은 음식을 먹었다. 선원들의 보급품을 많이 실으면 그만큼 상품을 쌓아 놓거나 생활할 공간이 줄어들기 때문에 그나마도 풍족하게 가져가지 못했다. 배에 의사가 있었지만 대개 '이발사' 수준이어서 문제되면 자르고 불로 지진다 정도였고, 나머지는 하느님이 알아서 한다고 하였다. 유명한 마젤란의 선단도 270명이 출발해서 15명만 돌아올 수 있었다. 

 

선상의 규율은 매우 엄격해서, 동성애를 '멍청한 죄'라고 간주하며 사형에 처하기도 했고, 싸우면 음식과 물을 한동안 제공하지 않았다. 싸움간에 살인이 일어난다면, 피해자와 가해자를 한데 묶어 바다에 던져버리기도 했다. 포도주를 훔치면 대걸레 자루가 산산이 부서지도록 맞거나 돌 머그잔으로 때려 이가 네대 나가거나 하는 식이었다. 닭을 훔친 선원을 모든 선원이 채찍질하게 만든다거나 하기도.. 선장과 간부들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특정 선원을 괴롭힐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다. 

 

선원들은 태업, 파업, 선상 반란, 집단 탈주 등의 단체 행동으로 대항하고는 했다. 전체 선상 반란 가운데 1/5 정도는 간부살해가 일어났고, 반 정도가 실제 배의 통제권을 장악하기도 했으며, 1/3 정도는 선원들이 해적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들의 문화는 부르주아 문화와 정확히 대척점에 있었으며, 금욕주의를 거부하고 현재 그대로를 즐기고자 했다. 육체적 향락, 음탕과 방종을 추구했다. 돈을 벌면 저축하는 법이 없고 술마시는 데에 바로 썼다. 종교는 경멸하면서도 미신에 집착하여 폭풍우를 피하려면 요한복음을 읽어라, 태풍을 이기려면 칼을 빼들고 마술의 삼각형을 그리라고도 하였다. 

 

해적의 세계: 근대 자본주의에 대한 반질서

 

해적은 그저 바다 위의 강도가 아니라, 국가로부터 적국의 선박을 강탈할 권리를 인정받아 국가 대신 공격 행위를 했다. 이것이 나중에 변질되어 국가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약탈 행위가 계속 된 것이다. '해적'은 꽤 넓은 범위의 말로, 사략선 업자, 버커니어, 그리고 좁은 의미의 해적이 있다. 

 

사략선 업자(Privateer, Corsaire)는 정부와 계약을 맺고 전시에 적선을 공격할 권리를 받은 사람이다. 유럽 각국이 해상에서 서로 경쟁하거나 전쟁 상태에 있을 때 무장을 갖춘 민간 선박에게 적국의 배를 공격하고 약탈하도록 권리를 주었다. 사략선업자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영국의 프란시스 드레이크이다. 에스파냐의 카카푸에고 호를 나포했을 때의 약탈물은 26톤의 은화, 8파운드의 금괴, 그리고 진주와 보석이 가득찬 상자들이었다. 이러한 그의 공헌(?)으로 1581년에 기사 작위를 받았고, 경(sir)잉 그의 이름에 붙었다. 해적은 조국의 적을 공격하면서 동시에 이익을 얻는 멋진 사나이들의 이미지로 그려졌다. 

 

<해적 드레이크>

 

버커니어(buccaneer)는 17세기 전반 카리브 해에서 에스파냐와 에스파냐 식민지의 선박들을 공격한 해적들을 일컫는다. 사냥한 고기를 훈제하는 데에 쓰인 석쇠를 가리키는 프랑스어 '부캉(boucan)'에서 비롯된 말로, 프랑스 계통의 사냥꾼 출신이었던 이들은 에스파냐가 1620년대에 이들을 축출하자 깊은 반감을 갖게 된다. 이들은 잔인하기로도 유명했는데 에스파냐인 포로를 심문하면서 다른 포로의 심장을 도려내어 다른 포로에게 강제로 먹이기도 했다. 

 

마지막 유형이 우리에게 익숙한 좁은 의미의 해적으로 국적을 가리지 않고 어떤 배든 공격하였다. 16세기의 사략업자에서 버커니어를 거쳐 18세기 초에 해적이 급증했는데, 버커니어를 공격하던 영국 해군이 에스파냐 왕위 전쟁을 거치며 급격히 줄어든 탓이 크다. 위트레흐트 조약(에스파냐 왕위전쟁 이후의 평화조약) 이후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는 약탈과 정복보다는 플랜테이션 방식으로 평화롭게 이윤을 얻는 방식으로 전환한다. 실직한 영국 해군들이 늘어나고, 실직을 면한 선원들도 급여가 절반으로 떨어졌으며, 선상 규율은 그만큼 엄격해져서 해적이 늘어나기 딱 좋은 상황이 된 것이다. 평화 조약 이후에도 자국의 배는 공격하지 않는 문화가 있었으나, 동인도 회사 선박을 공격한 에드워드 잉글랜드를 시작으로 유명한 바르솔로뮤 로버츠(400척 이상 나포), 블랙비어드(140척 이상 나포) 등의 전설적 해적들이 등장한다. 영국 정부는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어 이들을 소탕하고 점차 해적의 세력을 줄어든다(1716년 1,500명 수준에서 1725년에는 200명 이하로 줄어듦). 

 

해적에 합류하라는 말을 들으면 마지 못해 하는 척 했지만 선원들은 기꺼이 참여했다. 200톤급의 배에 전에는 15명 정도 일했다면 해적선은 물건을 실어나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80명 정도가 우글거렸다. 즉, 강도 높은 노동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게다가, 무질서가 판치기 쉽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법 밖에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들만의 법을 잘 유지했다.

 

바르솔로뮤 로버츠 해적들의 규율은 다음과 같았다.

1) 모든 선원은 현안에 대해 동등한 표결권을 가진다.

2) 모든 선원은 전리품 목록에서 공평한 몫을 요구할 수 있다.

3) 돈을 가지고 도박해서는 안된다.

4) 촛불은 밤 8시에 끈다.

5) 모든 선원은 즉각 전투에 사용할 수 있도록 늘 장비, 단검, 권총을 준비해야 한다.

6) 소년이나 여자를 배에 데려와서는 안된다.

7) 전투 중 탈주자는 처형하거나 무인도에 버린다.

8) 배안에서는 서로 때려서 안되며, 언쟁이 있으면 육지에 내려서 칼이나 권총으로 결정한다.

9) 각자 1천 파운드의 저축금을 채울때까지 현재의 삶을 계속해야 하고, 그 이전에 그만두겠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10) 선장과 조타수는 전리품 배당 몫의 2배, 포수와 갑판장은 1.5배, 다른 간부는 1.25배, 일반 신사들은 1배를 받는다.

11) 악사들은 안식일에만 쉴 수 있다. 

 

해적선의 가치는 평등주의이며 특이한 방식의 '민주주의'를 지향했다고 볼 수 있다. 해적선의 선장은 상선의 선장처럼 군림하지 않았고, 음식에 예민하기 때문에 선장이라고 음식을 더 많이 받지는 못했으며, 선실도 같이 써야 했다. 그들 자신이 일반 선박에서 가공할 폭력에 시달렸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폭력적인 위계를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해적은 해적이다. 압제에 대한 복수의 요소 때문에 해적들을 혁명의 전위인 것처럼 그리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그들에게 잡힌 포로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자비 했다.

 

해적들이 난폭했지만 한번의 거액을 얻어 외딴 섬에서 평화롭고 자유롭게 살았다고 믿어졌기 때문에 낭만적으로 그려졌다. 대표적인 작품이 '보물섬'으로 많은 선원들이 무인도에 버려졌으며, 외다리 해적도 실제했고, 앵무새를 데리고 다니는 해적도 있었다. 그러나, 해적이 공격하는 것은 금은보화보다는 무역품이 주였으며, 귀금속이나 현찰을 얻더라도 바로 써버렸기 때문에, 외딴섬에 보물을 묻고 지도를 그려두거나 하지는 않았다. 



댓글